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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 2017 NC다이노스 신인 1차 지명 선수 발표일.NC가 창단 후 첫 신인 지명이었던 2011년 8월 16일 '2012 신인 우선지명'에서 대졸 투수 노성호(현 상무)와 고졸 투수 이민호를 선택한 이래 이날 신인 지명은 여느 때보다 지역 야구팬들 이목이 집중됐다. NC가 처음으로 1차 지명에서 연고지역(경남·울산·전북) 선수 중 한 명을 선택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모두가 목 빼며 기다린 발표 순간. NC의 선택은 김해고 왼손투수 김태현이었다. NC팬들은 예상했든, 예상치 못했든 우리 지역 선수인 김태현의 지명을 환영했다.'아기 공룡' 김태현을 지난 18일 김해고 연습구장인 김해 삼계야구장에서 만났다.NC에 1차 지명을 받은 김해고 왼손투수 김태현이 NC다이노스 로고가 새겨진 야구공을 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우선 NC 1차 지명 축하한다. 예상하고 있었나."마산용마고 (나)종덕이가 1학년 때부터 잘한다고 유명해서 내가 될지 몰랐다. 내가 늦게 발동이 걸린 것도 있고 해서 불리할 거라 봤다. 거의 매 경기 스카우트들이 찾아왔지만 기대는 안 했다. 발표 당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는데 4시쯤 코치님이 숙소에 오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 NC 스카우트가 있었다."-NC 최초 연고지역 1차 지명자다. 기분은."지명받은 날에도 말했지만 얼떨떨하다. 아직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 내가 프로에 가서 잘해야 후배들도 주목받을 수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지명받고 이틀 뒤(6월 29일) 계약금 3억 원에 입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지명받은 후 부모님과 스카우트가 만났다. 계약금 때문에 눈치싸움도 한다고 하더라.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성적도 좋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해줘 고민할 거 없이 계약했다."-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초등학교 4학년 9월이었다. 친구들이랑 동네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내동중학교 박종호 감독님이 나를 보셨다. 일단 차에 타라고 해서 따라간 곳이 삼성초등학교였다. 테스트를 했는데 어느 손으로 던지는지 몰랐다. 다른 선수들이 오른손으로 던지기에 나도 오른손으로 던졌다. 못해서 떨어졌다. 하하. 돌아가기 전에 공을 주워 왼손으로 던졌는데 삼성초 감독님이 보시곤 다시 해보자고 하셨다. 거기에서 통과돼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감독은 투수로서 3박자를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은."경기를 하다 보면 야수들이 실책을 범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런 거에 신경을 안 쓴다. 수비가 실수해도 내가 막으면 된다고 마음먹는다. 그렇다 보니 야수들도 나를 믿고 수비를 잘해줘 내 성적도 좋아졌다. 야수가 무너지는 건 내가 무너지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김경환 김해고 감독은 김태현에 대해 제구력·멘탈·수비가 좋다고 칭찬했다. 김 감독은 "실책으로 주자가 나가도 흔들리지 않고, 강속구 투수임에도 제구력이 좋다. 견제능력뿐 아니라 키가 크지만 몸이 유연해 투구 후 수비도 수준급"이라고 말했다.-직구 최고 구속이 148㎞라고."올해 동계훈련 때 찍었다. 포심 외에도 투심,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던진다. 자신 있는 구종은 슬라이더와 투심이다."-프로에 가면 선발, 구원 중 어느 포지션을 맡고 싶나."어렸을 때는 마무리투수를 하고 싶었다. 승리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멋있나. 지금은 선발투수를 하고 싶다. 하지만 팀 사정상 마무리가 없다. 그래서 중요한 대회가 아니면 중간에 등판해 끝까지 던진다."-롤모델이 있나."류현진·양현종 선배를 좋아한다. 두 선배는 대담한 야구를 한다. 자기 야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야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기 운영 능력을 본받고 싶다."-NC의 시즌 마무리 훈련에 합류하면서 프로 선수로서 출발할 텐데 목표는."높은 벽이 많을 거다. 그걸 뚫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일단 첫해에는 1군 경기에 나서 경험을 쌓고 싶다. 1군 합류를 하면 다음 단계로 5선발이 됐든, 6선발이 됐든 선발진에 자리 잡고 싶다. 마지막으로 1선발로 팀의 주축선수가 되는 게 목표다. 5년 안에 이루고 싶다."-NC팬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1차 지명 선수들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다르다. 나만 믿고 열심히 응원해주시면 그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겠다."김태현은 인터뷰에서 국가대표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언젠가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고 말하던 그에게 며칠 뒤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야구협회가 오는 8월 30일 개막하는 '제11회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명단을 지난 21일 발표했는데 그 명단에 김태현의 이름이 올랐다.
16.07.27.마산종합운동장이 NC다이노스 신규야구장 리모델링(창원마산야구장)에 착수하면서 마산문화원도 정들었던 종합운동장을 떠났다. 이에 마산문화원 한 켠에 지난 2007년 10월 자리를 잡았던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도 정들었던 터에서 떠나게 됐다.이승기(78)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은 약 60년간 모아왔던 영화 포스터, 잡지, 이론서, 비디오, DVD, 팸플릿 등 약 1만 5000여 점을 마산종합운동장 내 창고에 보관 중이다. 영화자료관 터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탓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지난 60년간 영화 관련물을 수집한 영화광 이승기 관장을 만나 영상매체와 첫 인연, 그리고 현재와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잊지 못 할 영화와 첫 인연이승기 관장은 통영군 통영읍 명정동이 고향이다. 일제시대 선친이 서기로 일한 금융조합(현 농협) 뒤편에는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통영 유일의 극장 봉래극장이 있었다.6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봉래극장에서 태평양전쟁 뉴스와 사무라이 영화를 보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통영 충렬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낙동강', '마음의 고향', '아리랑'과 같은 영화를 단체관람하며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영화의 매력에 흠뻑 젖은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 했다. 그 시기 어린 이승기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일명 '개구멍 뚫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오래된 일본식 건물인 봉래극장에는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었거든요. 극장에서는 나무판자로 개구멍을 막아뒀지만 힘이 쎈 아이들이 저녁에 나무판자를 떼어내고 극장으로 들어가서 영화를 보곤 했었어요."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미국 영화 <화성초특급>에 대한 일화를 얘기했다."그날도 영화를 보러 어김없이 개구멍 뚫기를 통해 극장에 들어갔는데 표를 사서 입장한 관객보다 몰래 훔쳐보는 아이들이 많았고 사실을 알게 된 극장 관계자들이 공짜 손님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덩치 큰 형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자 붙잡혀서 극장 간판실에 끌려갔어요. 그땐 몰래 영화를 보다가 잡히면 모욕감을 주려고 간판을 그리는 물감으로 아이 얼굴에 칠하곤 했죠. 막 얼굴에 칠하려던 찰나에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 입장하는 사이 몰래 도망쳤어요."한 차례 혼이 난 뒤부터 이승기 관장은 '개구멍 뚫기'를 끊었다. 대신 극장 청소하는 일을 도와주거나 통영시 내에 걸어 놓았던 영화 간판을 극장에 가져다주고 공짜로 영화를 봤다.1953년. 통영에서의 유년시절은 마산으로 오게 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마산서중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하고 창신중에 다녔다. 그러나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4교시가 끝나면 곧장 도시락을 까먹고 오후에는 국제시장으로 달려가 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영화 관련 자료 수집을 시작하다"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그때 미국 영화 푸른화원(원제 작은 아씨들)을 감명 깊게 보고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어요. 준 앨리슨(June Allyson)이라는 여배우였는데 매우 단아하고 꿈꾸던 이상형에 느낌도 좋더라고요.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이던 그에게 영화잡지를 통해 알아낸 주소로 팬레터까지 보냈었죠."팬레터도 특별했다. 흰 종이에 글을 써봐야 읽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노란 물감으로 흰 종이를 염색했다. 노란색 종이를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린 뒤 친구 학교 담임선생에게 번역을 부탁하는 정성을 들였다. 팬레터의 내용은 의외로 심플했다. "당신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사인한 브로마이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명의 스타를 좋아하게 된 학생치곤 상당히 건전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답장을 받지 못 했다.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영화 관련 수집도 이맘때부터다.마산에 있는 극장에서는 창동 거리에 있는 일제시대 집 유리창에 영화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가 영화가 종영되면 회수를 했다. 유리가 깨져 있는 집을 눈여겨봤다 야간통행금지가 끝나거나 끝날 무렵 몰래 포스터를 떼 왔다. 가까스로 몇 장을 모왔는데 어머니 가게에서 팔던 밀가루를 담는 봉투로 사용해 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물론 이 외에도 수집한 것은 많다. 당시 영화 포스터를 줄여 뒷면에 해설을 붙인 영화 프로그램을 수집했다. 극장에서 한 장에 10환을 받고 팔았는데 한 장 한 장 사모아 약300장가량 모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물건이라 이제는 희귀한 자료가 된 셈.영화 관련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를 보는 데도 부지런했다. 학칙이 엄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진학한 뒤에는 영화를 통해 얻은 연기력으로 조퇴를 하면서까지 극장에 얼굴 도장을 찍었다.고교 3학년 시절이던 1959년. 태풍 사라호가 한국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준 다음 날, 시민극장에서 미국 영화 <뇌격명령>을 보러 갔다가 규율부 선생에게 걸렸다. 그러나 당돌한 10대 이승기는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영화를 계속해서 보러 다녔다. 끝내 15일간 유기정학을 받았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장사가 망하면서 끝내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그는 "주산이나 부기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영화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꿈이 좌절되면서 힘이 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이승기 관장이 웃으며 말했지만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사라진 당시,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미뤄 짐작조차 어려웠다.하루 4편, 1년 최대 210편 영화 관람졸업하고 군을 제대한 뒤 마산 오동동(창원 마산합포구)에 있는 술집 경기 담당 지배인으로 일했다. 약간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생각하고 맥주 가게를 개업했지만 2년 만에 망했다.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는 그는 1968년부터 18년간 한국연예협회 경상남도지부 사무국장을 했다.당시 마산은 유흥업소가 대단했다. 연예인이 많을 때는 200명 가량 활동했는데 회비와 자격시험 응시료 수입으로 연예협회 살림살이가 윤택한 편이었다.사무국장을 그만둔 뒤에는 생업은 주례로 했고 그 외 시간은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마산 합성동 아카데미, 양덕동 한일극장, 석전동 은하극장, 부산 범일동 보림극장, 삼일극장, 삼성극장 등은 2본 동시상영을 하기도 했다.이승기 관장은 아침 식사를 한 뒤에는 극장에 가 영화 두 편을 본 뒤 국수를 사 먹고 또 두 편을 관람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할 때면 일찍 버스를 타고 가 영화 네 편을 보고 시장에서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먹고 밤늦게 귀가하기도 했다.2본 동시상영 영화는 보통 6개월 전에 개봉된 작품이 많았는데 한 편을 10번 넘게 보기도 했다."영화를 보면서 영화 상영일, 극장, 제작자, 주연, 감상 소감을 기록한 영화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정리해보니 한 해 210편을 본 적도 있었어요."영화라는 우물만 판 결실을 맺다영화 관련물 수집에는 방도가 없었다. 그저 발품을 팔 뿐이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영화 서적을 사고 비디오 가게를 전전하며 비디오와 DVD를 구했다. 미국에도 세 차례나 방문해 원서, 원음 비디오, 영화 포스터 복사본 등을 사 왔다.노력의 결과는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 개관으로 이어졌다. 2007년 10월 개관해 최근 문을 닫기 전까지 1만 5000여 점의 영화수집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나 책 출간, 배우 출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해왔다.이 중 이승기 관장에게 <마산영화 100년> 출간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1907년에 문을 연 마산 최초의 극장 '환서좌'와 마산 최초의 극영화 '청춘의 설움'의 소개로 시작해 100년의 시간을 훑어가며 마산극장, 영화에 얽힌 이야기, 마산출신 영화인을 담아냈다.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학자가 아니고 인터넷이 서툴러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주위의 도움을 받았다.영화배우로 나설 때는 묘한 감정이 뒤섞이기도 했다. 어릴 때 꿈꿨던 감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적은 개런티에도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다큐멘터리 영화 <마산의 극장 역사를 찾아서>를 통해 '제3회 서울 노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영화에 출연할 때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내가 꿈꿔왔던 현실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소중한 순간이었죠. 몸은 피곤해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지자체에서 영화자료박물관을 열었으면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은 아직 재개관 여부가 불투명하다. 때문에 이승기 관장이 평생을 모아온 자료의 사용 여부 역시 명확하지 않다.그는 문화예술이라는 부분에서 영화만큼 파급력이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영화가 지닌 상품성, 관광가치를 높이 산다. 한 영화가 1000만 관객이라는 흥행가도를 달리는 데 대해 '영화만이 가진 특수성'이라고 한다.영화만이 지닌 파급력. 그 영향력을 이젠 지자체에서 관광상품화하길 희망한다."내일모레면 내 나이가 여든입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내가 모아온 자료를 지자체에서 박물관 형식으로 사용하면 좋겠어요. 모아온 정성이 있으니 무상으로 줄 순 없어요. 특색별로 포스터 전시를 하면 10년, 20년도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상품이 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된다면 내가 살아온 길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요."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이승기 관장은 창원시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들었다고 전했다.인터뷰를 마치고 이승기 관장에게 있어 영화를 빼고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었다.잠시 고민을 마친 뒤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영화에 미쳐서 가족들을 제대로 못 돌본 게 미안해서 해외여행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딸이 미국에 살아서 간 적 있는데 그때도 헐리우드 가고 영화, 영화 하다가 관광을 제대로 못 했지요. 가족끼리 (해외여행) 한번 가보면 미안함도 가실 것 같고 좋은 추억이 안 되겠습니까?"
16.07.19."경기단체 회장은 협회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죠."지난 6월 23일 2016년도 경남축구협회 대의원총회에서 초대 경남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김상석(57) 회장은 경기단체 회장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자리라고 강조했다.이날 당선된 김 회장은 앞으로 4년간 도내 최대 규모의 경기단체인 경남축구협회를 이끌게 됐다.그는 "회장 자리는 감투가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동하는 학생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큰 틀에서 종목의 먼 미래를 그려내야 한다"고 말했다.다음은 김 회장과 일문일답.- 회장 취임 후 일정은."굉장히 바빴다. 도내 축구계의 의견을 듣고자 현장을 발로 뛰고 있다. 엘리트축구와 생활체육축구가 통합한 만큼 시군 축구협회 분들은 물론 조기축구를 하는 동호인까지 만나야 한다. 새로운 이사진 구성 등 앞으로 4년간 경남축구의 미래를 그려야 하는 만큼 많은 분을 만나 조언을 듣고, 틈틈이 현장도 돌아보고 있다."-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축구 집안이어서 자연스럽게 축구와 친해졌다. 마산공고와 고려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형 김상문(전 대한축구협회 U리그 본부장)과 동생 김상덕(마산공고·한양대에서 선수로 활약) 덕에 어릴 적 축구장에 자주 응원을 갔었다. 작은 형(김상옥)도 함안군축구협회장을 지냈으니 이만하면 축구가족이라 해도 되지 않겠나."지난 6월 23일 경남축구협회 대의원총회에서 선출된 김상석 통합경남축구협회장.- 경력도 이채롭다."체육교사가 되기 위해 경남대 체육교육학과에 진학을 했다. 물론 특기생이 아닌 일반전형으로. 하지만, 교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아 졸업 후 크라운맥주(현 하이트맥주)에 취직해 영업사원으로 8년 정도 근무했다. 회사 일처럼 내 일도 열심히 하면 성공하겠다는 확신이 서 인쇄업(현 신명인쇄사 운영)을 시작했다. 회사는 잘 돌아갔고 주변 추천으로 1998년 창원시축구협회 이사가 됐다. 이후 총무이사, 창원시협회장을 거쳐 통합창원시축구협회장을 지냈고, 고 전형두 회장의 후임으로 경남축구협회를 이끌게 됐다."- 경기단체 회장은 출연금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써야 할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언젠가 아내가 '축구에 쓴 돈이 아파트 두 채 정도는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경남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1억 원을 내 매산축구장학회(김 회장의 호를 딴 축구장학회)를 만들었고, 연간 개인적으로 지출하는 돈도 5000만 원이 넘는다. 축구협회장이 되고부터 1순위도 회사가 아닌 축구가 됐다. 거래처를 방문할 시간에 축구장을 나가다 보니 회사 매출도 절반 이상 줄었다. 한때 15명이던 직원도 지금은 10명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축구협회 인원이 느는 만큼 회사 인원은 줄더라. 그래도 후회는 없다."- 축구협회장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얼마 전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작은 시골 마을의 남해초등학교가 우승했다. 마침 그날에 통합협회 추진을 위한 회의가 있었지만 강원도까지 가서 응원하고 격려를 했다. 우승이 확정되자 내가 눈물이 나더라. 지난 3년간 협회장으로 일하면서 휴가를 써본 적이 없다. 주말에는 주말리그대회가 열리고, 여름방학 기간에는 무학기 축구대회가 열려 쉰 기억이 없다. 그렇게 현장을 누빈 게 이번 선거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경기단체 회장의 최우선 덕목은 뭐라 생각하나?"봉사하는 자세다. 로타리클럽에서 활동하며 몸으로 봉사하는 법을 배웠다.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제대로 쓰는 법을 고민하다 경기단체장이 됐다. 한 번은 경기 도중 다친 선수를 위로하러 병원을 찾았다가 '매산장학회' 수상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뭉클했다. 회장으로서 보람도 느꼈다. 회장은 자리에 연연하기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적절한 조치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임원 선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첫째도 둘째도 화합 인사다. 경남축구협회는 두 번에 걸친 경선을 통해 많은 갈등이 생겼다. 새롭게 출범하는 협회는 엘리트와 생활체육을 모두 관장하기 때문에 이를 아우를 인사를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분의 의견을 듣고 있다. 기존 대의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많은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중지를 모으겠다."-축구협회장을 발판 삼아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도 있는데?"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실제로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축구협회장에만 전념하겠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난 회사일도 그렇지만 하나에 매진하는 스타일이다. 현재로선 축구가 내 인생의 최고 가치다."- 통합축구협회장으로서 앞으로 포부는?"협회장으로서 바람은 경남축구가 한층 튼튼해지고 도내 출신이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주요 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갔으면 좋겠다. 축구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기 종목인 만큼 그 사랑을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다. 두 단체가 통합한 만큼 생활체육으로서의 축구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겠다."
16.07.12.4년 전 런던에서 놓친 금메달은 잊은 지 오래다.김종현(31·창원시청)은 어느덧 사격 국가대표팀의 든든한 에이스로 거듭났다.런던올림픽 50m 소총3자세 부문에서 값진 은메달을 따냈던 김종현은 리우올림픽에서 메달 색깔을 바꿔 금메달에 도전한다.올림픽 무대에 처음 초대받은 권준철(28·창원시청)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다.5차까지 가는 치열한 선발전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그동안 창원시청 직장운동부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있었지만, 한 종목에서 두 명의 선수가 출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오는 8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하계 올림픽에 출전하는 창원시청 소속의 두 명사수 김종현과 권준철을 만났다.권준철, 김종현 선수.김종현 "올림픽 금메달 따서 예비 신부에게 프러포즈할 것"사격 국가대표팀의 '기록 제조기' 김종현의 시선은 벌써 2016 리우올림픽으로 향하고 있다.런던올림픽 이후 김종현은 국내 일인자는 물론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이번 대회에서도 김종현은 메달 후보 0순위일 정도로 기록이 좋다.그는 지난 2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2016 올림픽 사격 아시아 예선 50m 소총 3자세'에서 2관왕에 오르며 절정의 감각을 자랑했다.이번 우승은 지역 대회인 아시아선수권에서 올린 성과지만 의미가 크다. 김종현은 런던올림픽 은메달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시아선수권에서 그라나다 세계선수권 챔피언인 주치난, 창원 월드컵과 가발라 월드컵 우승자인 후이쯔청, 포트베닝 월드컵 우승자인 유리 유르코프(카자흐스탄) 등 세계적인 강자들을 꺾고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다.김종현도 최근 세계정상급 기록을 쏘면서 자신감도 부쩍 많아졌다.그는 "올림픽 출전 자체가 영광"이라면서도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메달권 진입도 무난할 것"으로 자신했다.김종현 선수.대학시절까지 무명 선수였던 김종현은 실업팀 입단 후 공기총에서 화약총으로 종목을 변경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8년 창원시청에 입단해 소총을 든 김종현은 2년 뒤 열린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하며 기대주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리고 화약총 입문 4년 만에 다른 대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올림픽 무대에서 당당히 2위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김종현의 이번 대회 목표는 분명하다. 바로 금메달을 따서 예비 신부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다. 김종현은 청주시청에 같은 사격선수로 활약 중인 권나라(29)와 오는 10월 29일 웨딩마치를 올린다. 김종현은 "대표선발전과 올림픽 출전 등으로 예비신부에게 모든 결혼 준비를 맡기게 돼 미안한 마음"이라며 "이번 올림픽에서 반드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는 프러포즈를 하고 싶다"고 빙긋 웃었다.김종현은 런던올림픽에서 결선에 오른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도 은메달에 그친 적이 있다.당시에는 본선과 결선을 합쳐 최종 순위를 매겼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결선 방식이 바뀌었다. 본선 점수를 무시하고 새로 시작하는 '제로 베이스'와 한 명씩 차례로 탈락시키는 '서바이벌' 방식으로 치러진다.이번 리우올림픽은 4년 전 대회 결선에서 보여준 김종현의 강심장이 다시금 빛을 발할 기회이다….김종현은 "프레 대회에 출전해보니 리우올림픽은 바람이 변수가 될 것 같다"면서 "평소 기록이 올림픽 메달권에 진입한 이상 실수를 하지 않고 경기를 마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권준철 "긴장되지만 나만의 노하우로 후회 없는 경기할 것"인천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권준철은 이번 리우 대회가 첫 올림픽 무대다.권준철은 "5차까지 가는 선발전이 끝나고 나니 한 시즌을 치른 것만큼 피로감이 몰려왔다"면서 "2차 대회부터 줄곧 1위를 하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탈락할 수도 있어 사격 입문 이후 처음으로 긴장을 했던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권준철은 이번 대표 선발전에서 남형진(정선군청), 한진섭(한화갤러리아)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부산이 고향인 권준철은 고교 시절 전지훈련에서 본 경남대 사격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반해 경남대로 진학했고, 군 제대 이후에도 다른 실업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창원시청에 입단했다.권준철 선수.이미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국제대회 경험도 있지만, 올림픽은 최고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무대인 만큼 살짝 긴장도 된다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권준철의 강점은 과감성이다. 권준철은 2시간 45분 동안 치러지는 시합에서 가장 먼저 사선을 나올 만큼 총 쏘는 시간이 아주 빠르다. 그는 "사선에 서면 긴장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손이 떨리기 전에 바로 방아쇠를 당긴다"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했다.심리적인 부담감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지만 그럴수록 메달을 향한 독기는 더 바짝 달아오르고 있다.권준철은 "각종 언론에서 사격하면 공기총만 두드러지고 있지만 종현이 형이랑 화약총에서 한 번 일을 내고 싶다"면서 "같은 방을 쓰면서 심리적인 부분 등 형이 많은 조언을 해줘 차분하게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번 리우올림픽에서 김종현은 50m 소총 3자세와 소총 복사, 권준철은 소총 복사에 출전해 금메달을 정조준한다.이들의 꿈은 메달 색깔과 관계없이 나란히 시상대에 서는 것이다.리우올림픽 결선에서 금메달을 놓고 둘이서 맞붙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떨까?권준철은 "형이 양보하겠죠"라며 슬그머니 웃자, 김종현은 "페어플레이 해야죠"라며 화답했다.창원시청 사격부 창단 이후 2명이 출전한 첫 올림픽 무대에서 과연 이들이 간절히 바라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16.07.04.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자택에서 만난 김대환(88) 화백. 요즘 두문불출한다는 원로 화가는 확실히 예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2년 전쯤 마산 홍화집 문화예술인 모임에서 빛바랜 사진을 들고 과거에 함께 했던 동료에 관해 이야기하던 때와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는 높았다.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리겠다'는 말을 강조했다."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 많이 들었다"요즘 노환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모임에는 잘 나가지 않는다는 김 화백은 준비했다는 듯이 자신의 일대기를 줄줄 쏟아냈다.그는 일본 오이타 현(大分縣) 오이타 시에서 1929년 3월에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4살 때부터 집에서 낙서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춘일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때 일본 사쿠라 화구 주식회사가 주최한 '일본 어린이 크레파스 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교포들끼리 축하 잔치를 열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다수 미술대회에서 입상하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대분중학교 3학년까지 일본에서 생활했다.개인의 인생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일본이 전쟁을 벌일 때 일본 내 군수 공장에 동원됐다. 오이타 뱃부 온천 쪽에 살다 시모노세키 모지 철도국 학도로 동원됐다. 일본 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등으로 유년기, 청년기를 보냈다.원로화가 김대환 화백.1945년 해방이 되면서 17살에 귀환동포로 한국에 돌아왔다. 동네에 그림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귀국 후 간판점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그림을 따로 배우지 못했지만 연극인 안윤봉 씨가 그를 알아봤다. 안 씨는 그에게 다른 화가와 함께 그림을 출품해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흔쾌히 동의했다. 1947년 19살 때 마산백화점에서 열린 '제1회 미술전람회'에 서양화 그림을 냈다. 골목길 풍경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었다. 참여 작가 중 최연소자였다. 전시장에는 내로라하는 경남 지역 작가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등 전국 작가들의 그림이 함께 걸렸다. 임호, 이림, 문신, 이준, 최운, 김종영, 양달석, 김기창 등 40여 명의 작가가 11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가위에 찔려 왼쪽 눈 실명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일하며 생활을 하던 중 사고가 났다. 간판점에서 일하던 다른 동료의 실수로 가위에 왼쪽 눈이 크게 찔린 것이다. 점심때에 식사를 하고 쉬던 중에 동료 2명이 가위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가위가 김 화백의 눈을 찔렀다. '내가 운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마산과 부산의 안과를 찾았지만, 치료가 어렵다는 답만 들었다. 주변에서는 '화가가 눈이 나쁘면 어떡하느냐?'라며 걱정을 했다. 김 화백은 나고 자란 일본에서 눈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거대한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던 소년은 2년 후 조그마한 밀선에 몸을 실었다. 몇 날 며칠을 굶으면서 배를 기다린 끝에 파고가 낮을 때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널 때 얼마나 착잡했을까.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 사는 셋째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는 시댁 식구를 보내서 동생을 집으로 데려왔다. 무사히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에서도 치료 시기를 놓친 눈을 고칠 수는 없었다.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누나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을 알려달라고 했고, 마침내 스승인 목교당을 만나게 됐다. 김 화백은 어릴 적 중학교 강당에서 본 목교당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4번씩 5개월간 동양화를 배웠다. 스승은 김 화백이 인물화에 소질이 있다고, 특기를 살리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단시간에 자신의 마음에 들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목교당의 권유로 오이타현 미술대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누나가 시집간 일본 성을 따서 '가쓰모토'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냈고, 당당히 입선을 했다. 1년가량 누나 집에서 보내며 그림을 배우는 사이에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불법으로 입국했기에 돌아가야 했다. 김 화백은 그림 스승 목교당을 잊지 않고자 자신의 호를 '교당'으로 지었다.원로화가 김대환 화백.18년간 간판 그림 그리다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극장에서 간판에 배우들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당시 전라도 출신의 이옥도 사장이 운영하는 국제극장에 취업했다. 국제극장은 건축가 출신인 이 사장이 일본의 극장을 본떠서 지었다.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불행이 반드시 불행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쪽 눈을 다쳐 실명인 김 화백은 눈 탓에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마산 구석에 있는 성냥공장에 청년들을 모아놓고, 징집자를 가려냈다. 신체검사를 해서 징집 대상자를 가리던 중에 눈을 이유로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김 화백은 "나는 그때 다친 눈이 덜 나아서 빨갰다. 우리 친구는 다 끌려갔는데, 나는 여기서 살았다. 눈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많이들 죽었다"고 회상했다.군 보급대로 동원됐다. 거기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전쟁터에서 쉬는 틈틈이 외국에서 온 UN군의 초상화를 그려서 벌이를 했다. "종이에 얼굴 그림 그려주면, 치약도 주고 해서 한 보따리 싸서 집에 갔다. 총각 때 그렇게 가져와서 이웃과 나눴다"고 말했다.원로화가 김대환 화백.전쟁이 끝나고 마산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극장 선전부장으로 간판 그림을 그렸다. 국제극장은 강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1년 23살이던 김 화백은 중매로 만난 20살 김금선 씨와 결혼했다. 부인 김금선 씨는 "그때는 직장이 없던 시절인데, 직장도 있고 벌이도 좋고 해서 일찍 결혼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18년간 간판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그러면서 최운(1921-1989), 문신(1923-1995) 선생과도 교류가 잦았다. '운이 행님', '문신 행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김 화백은 셋 중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돈벌이는 가장 먼저여서 술 한잔 사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어떤 그림도 그려내지만 특기는 미인도'언제까지 간판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18년 만에 간판 그리는 일을 관뒀다.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서다. 교방동, 추산동 등에서 거주하던 그는 두척동으로 집을 옮겨 작업을 해나간다.40대에 들어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 마산 창동 '왕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듬해 1969년 10월 마산 창동 '한성다방'에서 개인전을 잇달아 열었다. 이후 사천, 진주 등에서 개인전 7∼8회를 열었다. 개인전은 비용 등을 이유로 많이 열지 못했다.19살부터 현재까지 70여 년 동안 어떤 그림을 그려왔을까. 그는 "닥치는 대로 다 그렸다. 내 그림이 대중성이 있다. 미인도를 그리니 여자들이 더 좋아하더라. 나는 무조건 그렸다. 수채화, 펜화 가리지 않고 그렸다. 안 한 게 없다. 특기가 인물화다"라고 설명했다.그는 "미인도 화가라도 미인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미인도는 초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경치도 그린다. 안 기린 게 없다. 인물화는 (머리) 꼭지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안 중요한 게 없다"고 덧붙였다.원로화가 김대환 화백.인물화, 풍경화, 포대화상도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지만, 전시회에 미인도를 많이 냈다. 어떤 미인일까. 그는 "한국의 미인을 상상해서 그렸다. 누님을 많이 떠올리며 그렸다"고 했다. 한국의 미인. 김 화백이 상상한 한국의 미인은 쪽진 머리를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아한 여인이다. 시대에 따라서 동전과 옷고름 길이를 달리하면서 그의 붓끝에서 잊힌 여인들이 살아났다.종이에 아교를 끓여서 백분 가루를 타서 그림을 그렸다. 나무를 대서 천을 탱글탱글하게 해서 거기에 풀칠을 해서 날씨 좋을 때 동양화 물감으로 화폭을 채웠다. 목탄으로 윤곽을 잡고 그 위에 연필로 선을 그었다. 목탄을 털고, 부드러운 천으로 지운 후에 먹으로 선을 그어서 붓으로 고쳐가면서 그림을 완성했다.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많이 그렸다. 기릴(그릴) 때 최고를 기린다(그린다). 최고로 힘들게 해서 보낸다. 그래서 어느 작품이 최고였다고 말할 수 없다. 전부 다 힘들게 만들었다. 내 생애 최고작은 모두다.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원로화가 김대환 화백.죽을 때까지 그림 그릴 것김 화백은 요즘은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작품 구상 등을 하며 일상을 보낸다고 했다. 그는 "요즘도 작품을 그리고는 있다. 달마도, 포대도 등의 일필화를 그린다. 많이는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릴 것"이라고 작품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2년 전부터 노환으로 집에서 지내는 그는 고질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엎드려서 세필화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밥도 많이 묵고 매일 산책도 하면서 90세까지 살라고 용을 쓴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일찍 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웃었다.
16.06.28.